이주영의 소아응급 오디세이

기자명 더메디컬 편집부 (you@themedical.kr)
이주영 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응급의학 전문의
이주영 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응급의학 전문의

일곱 개의 해가 뜨는 작은 도시, 일곱 명의 여자가 살았다. 어느 집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아내였으며, 모두 엄마였다. 그들은 다 합해 아홉 명의 아들과 딸 여섯을 두었다. 한 사람이 잠들면 다른 한 사람이 깨어났고, 서쪽에서 해가 지면 동쪽에서 다시 동이 텄으므로 그 곳에는 어둠이 없었다. 여자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해를 띄웠고, 도시는 평화로웠으며, 아이들은 내내 웃으며 노래했다.

시내는 다 둘러보는 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아담했다. 한 가운데에 작은 터미널이 있었고, 도시의 경계에는 더 큰 도시로 향하는 역 하나가, 그리고 그 사이에 이름난 빵집이 있었다. 근교 쪽으로는 작은 마을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마을들은 세 갈래로 나뉜 도시의 길을 따라 연결되거나, 혹은 뻗어나갔다. 남쪽 갈래는 먼 평지로, 동쪽 갈래는 깊은 숲으로, 서쪽 갈래는 갯벌이 넓게 펼쳐진 어두운 바다를 향해 있었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도시를 향해 오고, 또 떠났다.

 

[그림=일러스트레이터 박상철]
[그림=일러스트레이터 박상철]

종종 그녀의 존재를 잊는 사람들

멀리서 보면 해는 밝게 빛나는 동그란 풍선처럼 보였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공기처럼 가볍게 둥실 떠올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들은 그 빛을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서 보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동적인 일인지 종종 혼잣말로 감탄하곤 했다. 큰 도시로 나가 초와 기름을 팔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녀들은 하루 종일 아이들 곁에 머물며 매일의 반짝이는 해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빛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종종 그녀들의 존재를 잊곤 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연극에서 가장 마음 편히 행복한 자리란 주인공이 선 스포트라이트 한 가운데가 아니라 배경 한 귀퉁이에 놓인 의자 정도인 법이다.

하늘은 밝은 날도 어두운 날도 있었다.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날은 여자들이 아무리 높이 해를 띄워도 좀처럼 거리가 밝아지지 않았다. 변두리 공장에 태울 것이 수북한 날에는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온통 뒤덮었다. 작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도시란 복잡한 곳이었으므로 해를 다른 자리에 띄워 보거나 때로는 허락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해 구름을 피해 뛰어다니며 도시를 비춘다 해도 후미진 건물 귀퉁이의 구석까지 다 동시에 밝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도시로 온 지 열 번째의 겨울이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고 사람들은 웅크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그 겨울은 전에 없이 추웠기에 석탄과 기름은 상점마다 점심 시간이 되기도 전에 다 팔리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세 명만 모이면 날씨 이야기를 했다. 해가 내내 떠 있어도 찬 공기를 다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어둠을 잊은 사람들은 점점 온기에도 익숙해져 겨우내 아껴 써야 할 석탄을 크리스마스가 오기도 전에 이미 다 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금요일의 여자가 해를 밝히던 어느 날, 외곽에서 큰 화재가 났다. 건물 여러 채가 불에 탔고 연기가 너무 심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지면에서 함께 밝힐 석유등이 필요했지만 그건 이미 오래 전에 다 써버렸다고 했다. 여자는 답답한 마음에 해의 고도와 위치를 바꿔가며 도와 보려 했지만 사람들은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여자가 해를 높이 띄워 넓게 비추려 하자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고 화를 냈고, 낮게 내려 가까이에서 밝혀 주려 하니 태워 죽일 셈이냐며 삿대질을 했다. 여자는 하루 종일 잠자코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 주었지만 내내 타오르는 해를 잡고 있는 바람에 두 팔과 손을 다 데고 말았다.

 

“해가 없으면 어때, 촛불을 켜면 되지”

월요일의 여자는 깊은 숲 속에 살았다. 다른 여자들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깨어 달려 나와야 했고, 월요일의 해가 지고 집으로 돌아가면 이미 하루가 더 지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점점 지쳐갔지만 그걸 알아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늘 하던 일이니까, 매주 몇 시간씩 더 일찍 지치고 매번 조금씩 빛이 옅어지는 건 다른 여자들조차, 심지어 그녀조차 뒤늦게 깨달은 변화였다. 해가 지지 않는 도시였지만 정작 그녀의 집에는 해가 잘 들지 않았다. 소녀들은 엄마를 부르다 잠들었고 그녀는 그것이 안쓰럽다가, 슬프다가, 화가 났는데, 그 화는 해를 향한 것인지 어둠을 향한 것인지 다른 무엇을 향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수 년이 흘러 잠에서 깨어나기가 더 이상 어려워진 어느 새벽, 월요일의 여자는 생각했다. 해를 띄우는 것을 꼭 도시에 나가서 해야만 하나. 내가 사는 집 안에도 빛은 필요할 텐데. 이제 더 이상은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겠어. 월요일의 여자는 자명종을 끄고 깊은 잠에 들었다.

수요일의 여자가 해를 밝히던 날에는 전에 본 적 없는 큰 폭풍우가 몰아쳐 왔다. 여자는 필사적으로 해를 밝혔지만 거대한 비구름은 그녀의 몸마저 삼켜 버렸다. 여자는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달아났고, 끝내 해를 놓지 않았지만 해는 잔불만 남기고 거의 꺼진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해를 찾는 외침과, 여자를 부르는 소리와,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기도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새벽이 다 지나도록 혼자 싸우던 그녀는 벼락이 잠시 멈춘 사이 얼른 이웃 마을로 달려가 작은 불씨 하나를 얻어 왔다. 해는 다행히 무사했다. 그러나 만약 해가 기어코 꺼졌다면 이 도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는 자신의 심장마저 꺼져버린 듯한 지친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집 앞에는 신문이 한 장 놓였다. 도시의 행정가들은 기자 회견을 열어 다시는 도시에 해가 꺼지는 일이 없게 하겠노라, 그걸 실패하는 자들에게는 단단히 책임을 묻겠노라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여자는 기사를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집에 있는 가장 큰 가방을 꺼내 현관 앞에 쌓인 신문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여자는 먼 곳으로 가 이 신문들을 태우기로 했다. 수요일의 여자가 길을 떠났다.

토요일의 여자는 사실 해를 만져서는 안 되었다. 해에 닿을 때마다 피부가 달아 올라 결국 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도시를 떠난다면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 사이, 잠시 반짝이는 오로라가 분명 그리워질 테니 지금은 차마 멈추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붕대 감은 손으로 아무렇지 않은 체 해를 띄우며 다른 여자들에게 웃음을 건넸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낡은 붕대 한 겹만으로 언제까지 이 일을 해낼 수는 없다. 알약을 한 움큼 삼키고 손에 쥔 붕대를 가만 바라보았다. 빨래통에 넣을까, 잠시 고민하다 다시 붕대를 꼭 쥐어 본다. 이 붕대가 사라지면 오로라도 사라질 것이다. 토요일의 여자는 입술을 가로로 꼭 다물며 붕대를 벽난로 속 장작 사이로 던졌다. 파슷, 하고 작은 불꽃들이 튀며 마지막 오로라가 설핏 스쳐가는 것 같았다.

왁자지껄한 크리스마스 주간이 끝났다.

화요일의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 그녀가 늘 걷던 거리 담벼락에 누군가 휘갈겨 쓴 푸른 글씨가 눈에 띄었다. ‘해 같은 건 필요 없어. 아름다운 건 장식 나무 위에 뜬 별이야.’ 고개를 갸웃하며 작은 개울을 건넜다. 이번에는 낡은 나무 울타리에 빨간 글씨가 쓰여 있었다. ‘해가 없으면 어때, 촛불을 켜면 되지!’ 다음은 모퉁이의 경계석 위, 다음은 집을 둘러싼 담장, 그 다음은…? 그녀는 입안의 점막을 살짝 씹었다.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체 하기는 힘들었다. 부정할 수 없다. 글씨들은 굳이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대문에서 마지막 메시지를 발견했다.

 

한국 소아응급 의료에 어둠이 내린다

“가장 무능한 자가 가장 뜨거운 것을 만진다.”

여자는 가만히 멈추어 대문을 잠시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담장과 대문을 닦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애써 닦은 들, 거리와 울타리, 그리고 바위 위의 글씨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화요일의 여자는 말 없이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다섯 명의 여자가 사라졌다. 그 동안 해는 뜨다 말다 했다. 세 명이 모이면 날씨 이야기를 하던 12월은 두 명만 모여도 사라진 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1월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진 해가 무척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왜 그런지 별로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그저 사라진 여자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 그리고 무능하거나 혹은 무책임한 타인에 대한 멸시와 조롱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해가 사라진 거리에서 소리는 멀리 퍼져나갔다. 그 소리는 어두운 밤 요람 위의 자장가처럼 새 아이를 밴 목요일의 여자마저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해가 진다. 일요일이 저물어 간다. 내일의 해를 기도하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하지만 이제 해는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도시의 낮은 끝났다.

이것은 대한민국 소아 응급 의료에 밤이 내린 이야기. 아마도 곧 잊혀질 우리의 이야기.

 


◇이주영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소아전문응급센터에서 의사로 일했다. 동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 받았다. 절반은 의사로, 절반은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 가운데 찰나의 기쁨과 스쳐가는 감사의 순간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 쓴다.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