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글에서 19세기에 페로 제도, 하와이, 피지, 그린란드에 홍역이 유행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발병률이 99.9%라거나, 피지 인구의 약 3 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는 통계는 홍역의 무시무시한 전염력과 병독성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페로 제도 이야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5개월 만에 주민 7782명 중 약 6000명이 홍역에 걸려 100명 넘게 사망하는 와중에도 고령자들은 무사했다는 거지요. 어떻게? 이들은 65년 전, 어릴 적에 홍역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현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홍역은 무서운 병이
AI로봇 소재 SF영화 ‘아카이브’일본의 어느 오지에 있는 비밀스러운 연구소에 AI 로봇 전문가 조지가 로봇 둘을 데리고 살고 있습니다. 조지는 회사의 비밀 프로젝트인 고성능 AI 로봇 개발 연구를 해왔는데, 갑자기 CEO가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조기 종료한다는 통보를 합니다. 그리고 성과물을 당장 제출하라고 보챕니다. CEO는 몰랐지만 조지는 회사 돈으로 개인적인 연구를 해왔습니다. 고성능 AI 로봇 J(쥴스) 3를 만들어 죽은 아내의 ‘마음’을 다운로드할 작정이었습니다.아내 줄스는 최근에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1.구급차는 흔들렸다. 좌회전과 우회전마다 몸이 쏠렸다. 유니폼을 단정하게 입은 구급대원과 짙은 청색 근무복을 입은 나는 그때마다 균형을 잡으려고 목각인형처럼 상체를 움직였다. 환자가 누운 이동식 침대도 덜컹였다. 환자에게 연결된 수액들, 모르핀이 섞인 수액과 혈압강하제가 섞인 수액도 천장에 달린 훈제햄처럼 대롱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입을 열었다.“대동맥(aorta)은 심장과 연결된 굵은 동맥입니다. 심장에서 바로 혈액이 뿜어지는 곳이라 세 개의 아주 튼튼한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손상이 발생해도 세
한산한 저녁이었다.응급실은 대개 늦은 저녁부터 자정 사이에 가장 바쁘다. 그러나 그 날은 어쩐지 내내 조용히 하루가 흘렀고 우리는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답답한 진료실에서 나가 간호사 스테이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새로 개봉한 영화 이야기, 근처의 맛있는 떡볶이 집, 며칠 전에 다녀간 복잡한 환자에 대한 수다를 나누었지만 한참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도 오늘따라 환자가 적다거나, 저녁 내내 한산해서 좋다는 말은 아무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면, 반드시 이상한 환자가 오거든. 상태가 아주
독일 통일 배경 영화 ‘굿바이 레닌’영화 배경은 동독 붕괴와 독일의 통일 기간인 1990년 무렵입니다. 1989년 10월, 철의 장막 너머 동 베를린에 자유의 바람이 붑니다. 장벽을 거부하는 시위에 가담한 동독 청년 알렉스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맞선 경찰에 끌려갑니다. 우연히 이를 목격한 모친은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모친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공산당원이었으니 큰 충격을 받을 만합니다. 병원으로 실려간 모친은 심장마비와 그로 인한 추가적 뇌손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집니다.그 사이 역사의 큰 물줄기가 바뀝니다. 미국과 소련이 화해하고, 소
안개가 걷히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큰 도시는 익숙해지질 않는단 말이야.’ 바닷바람이 한바탕 뱃전을 휩쓸고 지나갔다. 황급히 옷깃을 여몄지만 여지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으슬으슬 몸이 춥고 떨렸다. 하지만 그는 미소 지었다.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앉아 뜨끈하게 데운 포도주를 한잔 들이키면 감기 따위는 금방 떨어지리라. 일은 그렇게 풀리지 않았다. 열이 계속 오르더니, 기침이 심해지고 눈이 충혈되었다. 사흘 뒤 얼굴을 시작으로 붉은 반점이 돋아나 온몸으로 퍼져
일곱 개의 해가 뜨는 작은 도시, 일곱 명의 여자가 살았다. 어느 집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아내였으며, 모두 엄마였다. 그들은 다 합해 아홉 명의 아들과 딸 여섯을 두었다. 한 사람이 잠들면 다른 한 사람이 깨어났고, 서쪽에서 해가 지면 동쪽에서 다시 동이 텄으므로 그 곳에는 어둠이 없었다. 여자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해를 띄웠고, 도시는 평화로웠으며, 아이들은 내내 웃으며 노래했다.시내는 다 둘러보는 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아담했다. 한 가운데에 작은 터미널이 있었고, 도시의 경계에는 더 큰 도시로 향하는 역 하나가,
사내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당연히 취하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할 수 있는 날은 매달이 아니라 매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범위에 불과했다.물론 사내도 처음부터 그런 심각한 주정뱅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년에 접어들 때까지도 또래의 다른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음주에 관대하고 거친 삶이 보편적인 문화에서 성장한 터라 술을 가까이 두고 즐겼으나 ‘구제할 수 없는 술꾼’으로 손
영국군 오폭의 참상 고발한 영화 ‘폭격’1945년 나치 독일 점령하의 덴마크의 시골, 결혼식 하객들을 태운 택시가 영국 공군의 폭격을 받는다. 지나가던 소년 헨리가 참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폭격기가 날아오는) 하늘만 보면 겁에 질린다.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의사는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걸린 어린 소년에게 “정신 똑바로 차려!”라며 고함치고 윽박지르기만 한다(의사 맞아요?). 의사의 충격요법 때문에 더 큰 상처를 입은 불쌍한 소년은 아예 말문을 닫아버린다. 엄마는 헨리를 괴벤하운(코펜하겐)에 있는 이모집으로 보낸다
말라리아가 인류 최초의 전염병이라면 적어도 10만~20만 년간 우리를 괴롭힌 셈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말라리아 치료제를 찾아냅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남미로 건너갑니다. 특히 당시 신생 수도회였던 예수회 사제들은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영화 《미션》에도 나온 것처럼 사제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아픈 사람들을
5세 여자 아이가 한 번 구토 해 응급실로 왔다. 멀리 살고 있는데 근처에 있는 휴양림으로 가족 여행을 와 호텔에 묵고 있다고 한다. 낮에는 물놀이를 하며 잘 놀았지만 저녁부터 상태가 좋지 않고 배를 아파하는 것이 아무래도 저녁에 먹은 호텔 음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엄마는 힘 주어 말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의 복통은 호전 된 상태였다. 한 번 토를 했지만 두 시간 이상 아무 증상 없이 잘 놀고 있었고, 배 진찰 소견이나 엑스레이 사진도 나쁘지 않았다. 특별한 치료 없이 지켜봐도 될 것 같아 가족들의 상태를 물어 보니
1.언뜻 보면 환자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없었다. 자해를 목적으로 농약을 마신 여느 환자처럼 건조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주변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환자가 마신 농약은 저독성이었다. 파라쿼트(paraquat), 유기인계(organophosphate), 유기염소계(organochloride) 같은 무시무시한 종류가 아니었다. 농촌에 위치한 분원에서 본원으로 환자를 전원한 이유도 ‘폐쇄병동 입원을 통한 정신과 진료’가 목적인 듯했다. 그래서 굳이 환자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을 듯했다. 또, 이미 인계를 끝내고 퇴근을 준비하던
콜린 퍼스, 제프리 러쉬 주연 ‘킹스 스피치’연설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영화는 흔치 않겠지요? 첫 장면은 1925년 대영제국박람회장의 폐회식입니다. 국왕 조지 5세의 차남 알버트 왕자가 폐회사를 낭독하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연설을 망칩니다. 사실 왕자는 심한 말더듬이입니다. 교정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모두 헛수고입니다. 결국 포기하고 말죠. 다행히 왕위를 계승할 형도 건재하니 그냥 평범한 가장으로만 머물고 싶습니다. 하지만 왕자빈인 엘리자베스는 싫다는 그를 기어이 언어치료사 라이오닐 로그(Lionel Logue)에게
파피루스에도 기록된 인류 최초 전염병말라리아는 플라스모듐이라는 원생동물이 일으키는 병입니다. 원생동물이 뭔지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아주 복잡해질 테니, 단세포 진핵생물이라고만 알고 넘어 가지요. 세포 한 개로 되어 있으니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습니다. 린네가 1758년에 출간한 『자연의 체계(System Naturae)』에 원생동물은 단 2종이 수록되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65,000종이 넘습니다. 대부분 자유생활을 하지만, 일부는 기생생활을 하며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인간 병원체로 유명한 것이 아메바, 이질 아
조용한 비번 날 오전, 빨래를 하고 있던 다용도실에서 크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종종 있었던 일이고 구입한 지 8년이 넘은 낡은 세탁기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소리는 그물망에 넣은 빨래들이 한 쪽으로 쏠려 균형을 잃은 탓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저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세탁기의 작동을 잠시 멈추고 세탁물을 다시 정돈하려던 순간 세탁기의 본체 하부로 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이런, 내가 손 쓸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겠구나.’제조사의 서비스 센터에 모바일로 고장 수리 문의를 남겼다. 2시간도 안 되어
침대에 누운 환자는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상체를 일으키면 조금이나마 답답한 가슴이 나아질까 싶지만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다리에는 버둥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눈은 충혈되었고 몸에는 땀부터 오줌까지 온갖 분비물이 말라붙어 퀴퀴한 냄새를 풍긴다.“숨이 막히잖아요! 어서 뭐라도 해주세요!”보호자는 간절하게 말한다. 거기에는 ‘제대로 조치하지 않는다’란 원망이 조금 섞였다. 하지만 환자의 증상은 호흡곤란이 아니다. 적어도 혈액에는 산소가 충분하다. 손가락에 센서를 연결하여 측정하는 모니터의 산소포화도도 100%를 가리키고 동